죄송합니다. 이래저래 많이 격조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집중해서 글쓰기를 지속할 여유가 되지 않았기도 했고, 구상했던 기획이 잘 진행이 안 된 이유도 있습니다.

(인터뷰 기획은 늦어도 봄부터는 녹취를 풀고 지속할 예정입니다. - 오히려 강사법 관련 인터뷰 대상자가 되는 경험이 있기도 했군요. ㅋ)

SNS와 메신저에서 탈출하게 된 만큼 앞으로는 조금이나 짬이 나게 되면,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쪽으로 진행하면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의 일정은 번역 숙제를 생각만큼 빠르게 마무리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많은 분량의 숙제 마무리에 허덕이면서 다른 숙제를 더해서 정리하고 있고...

(아, 그래도 약속드린 책 중 하나는 3월에 출간 예정으로 되어 있고 이게 그르쳐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대학 입시의 정시 일정을 학생들과 함께 마무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마도 다음 주 정도 되면, 그나마 영화 관련 썰을 하나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최근에 본 작품 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바닷가재(The Lobster>)에 대한 평을 '쓰고 있'습니다.

기괴하다고 느끼시거나 씁쓸하다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듯도 한데...

꼭 한 번은 볼 만한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Posted by sungken

어쩌다 보니 예전에 놀던 곳에 이런 글을 하나 썼습니다.

좀 청승인 것도 같지만...

아무튼 최근의 상태는 이렇습니다.

좀 길지만 읽어보시려면 누르셔요.




Posted by sungken

약간은 피곤한 몸으로 24시간 하는 카페에 작업을 하러 들어갔다.

다행히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의외로 좀 시끄러웠다.

이유인즉슨 가운데 널찍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처자 삼인의 대화 때문이었다.


의외로 앳된 얼굴의 처자들이었는데,

목소리의 톤이 톤이 상당히 높아서 굳이 엿들으려는 게 아니었고,

따로 이어폰을 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거진 다 듣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앳된 얼굴'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것은

나이를 따지는 차별적인 의도라기보다는 그네들의 정황을 언급하는 데

필요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선 까닭이다.

(물론 '처자들'이라는 언급 역시 그네들이 자신들의 젠더를 드러낸 연유에서다.)


먼저 가장 불편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네들의 주변에 대한 무신경이었다.

한적하기는 했지만, 아니 오히려 한적했기에,

그렇게 주변에 울릴 정도의 큰 발성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졌다.


물론 큰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에는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사실 이때는 합리적인 이유보다는 작은 소리에조차 민감한 심리의 문제가 작동한다.

음악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집회에서조차) 고성을 듣게 되면 공포를 느낀다.

(내게 고성은 부모의 힐난, 중고교 시절의 고압적 분위기, 군훈련소의 폭력과 같은 표상들과 결부되어 있다.

더구나 개인적인 어조 역시 소위 씩씩하고 굵은 '남자다운'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여성적인' 목소리나 말투를 지닌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불편했던 것은 사용되는 수식어들이었다.

(이미 꼰대인 까닭에) 크게 다른 의도가 있기보다는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거나 표현을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의도로 이해는 하지만,

상당히 듣기 거북해하는,

'존나', '졸라', '씨발', '미친', '개 같은'이라는 표현들이 없는 문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정도 한도가 있다거나 가끔 사용하는 경우라면 그럴 수 있다 싶었을 텐데,

정말 자리에 앉아서 듣게 된 대화 내용의 70%에 이를 정도가 되니 고역이었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저 그 표현들을 배설하기 위해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고통을 겪으며 자리를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어쩌다 귀에 들어온 대화 주제는 문제를 일으킨 건 그네들이 아니라,

역시나 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한국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제야 '앳된 얼굴'이라는 표현에 대해 해명을 하게 되는데,

그네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대학생 애들은'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자신들을 구별짓는 와중에

드러나는 것은 학력의 차이에 따른 여러 차별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노고를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는 상급자 혹은 고용주들에 대한 분노가 들렸다.


'개 같이도' 대학생 인턴 애들보다 일은 많이 하는데,

'미친' 상사는 업무 능력에 대한 지적질을 하면서 그네들을 비하하는 모양이었다.

'졸라', '씨발'스러운 상황인 것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네들의 입장에서 해석된 상황일 터이니 정확한 이해는 아닐 수 있지만,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옳은 상황은 아닐 터이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러한 상황들이

그네들의 심사를 비틀리게 만들어 판단을 흐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직접 마주치는 사람들과 상황에 대한 분노가 쌓인 것 같은데,

그 이야기들은 다른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까지 번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조금은 전하기 껄끄러운 이야기들이기는 하지만,

그네들은 가족관계, 연애, 결혼에 대해서도 날 것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과 생활방식을 통제하려는 '엄마년/아빠놈'이 있었고,

좇아다니더니 한 번 같이 자고는 바로 잠수를 탄 (대학생) '씨발 새끼'도 있었고,

학력과 직업이 안 좋으니 지금부터 결혼자금이나 '졸나' 모아야,

데려갈 상대가 생긴다는 '존나' '개같은' 충고를 하는 '미친 년/놈' 의 상사들도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감상적으로 참담하고, 안타깝고 했다.

한데 다음 얘기부터는 그만 길을 잃고 정신줄을 붙잡기가 힘들어졌다.

이런 상황이 전부다 '존나' 데모만 하고 대통령한테 딴죽만 거는

'미친', '씨발' 좌빨들 때문이란다.


이런 친구들과 어떻게 고민을 나누고 대화를 하고 같이 살아가야 할지

점점 더, 더더욱 모르겠는 미궁에 빠져들었고

결국 다음 얘기에서는 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팔자고칠 돈이 생긴다면, 세월호 유가족들처럼 하겠다는...


약자들의 분노가 더 약한 이들에 대한 오해로 향하는 삶,

지금,여기는 세상 어느 다른 곳에서도 찾기 힘든 침몰의 시공간이다.

이상으로서의 now-here = nowhere라는 말장난의 지나치게 어두운 현실 판본이다.



Posted by sungken

<상상하다>를 한자로 쓰면 <想像>이고, 독일어로 쓰면 einbilden이다. 독일어의 Bild가 그림을 의미하니까 독일어의 <상상하다> <그림을 그리다>는 의미인 듯하다. 한편 <想像>의 뜻을 새겨보면 <> <생각하다>이고 <> <형상>을 의미하니 상상이란 곧 형상을 생각한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형상은 그림과 통하므로 독일어와 한자에서 상상은 그 어원이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즉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상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 <想像>의 어원에는 독일어에서 드러나지 않고 있는 독특한 것이 들어 있다. 바로 <>이다. 형상은 형상인데 그냥 일반적인 형상이 아니라 사람()과 코끼리()와 관련된 형상이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로는 <想像>이란 사람 중에서도 특히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머리 속에 무언가를 그려내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은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다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등을 쓸어보는가 하면 코를 잡아 늘여 보기도 하면서 장님은 코끼리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손바닥과 손가락에 와 닿는 무정형의 느낌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장님은 과감하게 그림을 그려야 한다. 딱히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없다. 단순히 코끼리 앞에서 줄행랑을 놓지 않는 한, 도대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촉각만으로 시각적 형태를 용감하게 그려내야 한다. 쿵쿵, 육중한 느낌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때로는 공포를 자아내기도 하면서 자기 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저 미지의 동물, 두려움의 대상인 듯하지만 알고 나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저 동물을 비로소 만나는 방법, 이 방법이 바로 想像이다.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져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두렵다. 그래서 겁난다. 그러나 만져 보아야 한다. 만져보지 않으면 그릴 수 없다. 상상할 수 없다. 촉각의 느낌이 제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희미하나마 그 촉각을 실마리로 삼지 않으면 도대체가 아무것도 그릴 수 없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기둥 모양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코끼리와 소중한 만남을 이루었으니까.

 

상상이란 이미 견고한 형태를 가지고서 존재하고 있는 사물의 모사가 아니다. 그런 것은 벌써 가능함이 입증된 것이요 더 나아가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상상이란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임에도 이 세상에 희미한 숨소리를 내며 엄존하는 것을 비로소 만나 어렴풋하게나마 만져보고 그려내는 것이다.

 

상상의 하나가 불가능 속에 갇혀 있어 존재의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밖의 우리와의 소중한 만남이라면, 그 둘은 이 만남을 그림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그리움이 있다. 사무치는 그리움 없이는 그림도 없다. 그림과 그리움의 말뿌리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가능에 갇힌 존재에 대한 상상은 만남에서 시작되는 한에서 나눔이다. 하나의 만남에 두 개의 상상이 있다. 나에 못지않게 내 밖의 또다른 나인 너 역시 나와의 만남을 통해 상상한다. 나는 너에게 코끼리다. 만남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모태로 하여 나와 너의 서로 다른 그리움이 갈라져 나오고 여기서 다시 나와 너의 서로 다른 그림이 자라 나온다. 마치 같은 수정란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독자적인 두 세포로 분열되듯이, 또 본래 하나였던 영혼이 서로 그리움을 간직한 두 도플갱어로 나뉘듯이, 아니 로스코의 저 하나였던 캔버스가 서로를 영원히 갈망하는 두 화면으로 결연히 분할되듯이. 상상이 수행하는 나눔의 과정은 만남을 매개로 한 독립적인 두 생명의 재탄생과정인 것이다.

 

이런 뜻의 나눔이란 내가 가진 것을 우월감 속에서 내 밖의 나에게 주는 일방 시혜적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만남을 그리움 속에서 저만의 두 그림으로 키워내는 쌍방 독립적 과정이요, 한낱 파이의 나눔이 아니라 만남의 나눔이며 아니 차라리 만남의 키움이다.

 

어디선가 코끼리의 불가능한 숨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이 아니라 불가능을 꿈꾼다. 그를 만나려 한다. 상상이 시작되고 나눔이 시작된다. 하지만 가진 게 많아 두려움에 사로잡힌 어른의 상상력이 아니라 가진 건 없지만 설레임에 두근거리고 그리움에 사무친 어린 아이와 연인의 상상력으로! 바로 나눔의 상상력으로!



Mark Rothko, Orange and Yellow,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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